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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ore Daumier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며 판화가. 19세기 프랑스 정치와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서민의 고단한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4,000여점에 이르는 석판화를 비롯한 방대한 작품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생생한 증언이다.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가난한 유리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 아버지가 시인의 꿈을 품고 출판의 기회를 얻고자 파리로 떠났고, 2년 후 가족들도 파리로 이주했다. 어려서부터 법률사무소 사원으로, 서점의 점원으로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그는 그만큼 일찍 현실의 냉혹함과 맞닥뜨려야 했다. 도미에는 알렉상드르 르누아르(Alexandre Lenoir)의 작업실에서 미술 공부를 했으며, 아카데미 쉬스에서 인체 데생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그의 배움은 거의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도미에는 석판화가로 일하다가 1830년 시사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 La Caricature』의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시사만화가로 화단에 데뷔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엄청난 세금 인상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국왕 루이 필리프의 모습을 가난한 백성들이 바친 금화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살찐 대식가로 묘사했다. 또한 정치인들은 국왕이 배설한 쓰레기를 놓고 서로 싸우고 있는 인물로 그렸다. 도미에의 이 같은 정치적 캐리커처들은 곧바로 루이 필리프를 분개하게 만들었고, 그는 1832년 체포되어 벌금을 물고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 주간지는 1834년 검열로 폐간되었다.





도미에는 1835년 검열법 때문에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대신 파리 사람들의 생활상과 풍속을 그리는 것에 전념했다. 『르 샤리바리 Le Charivari』지에는 그가 제작한 3,958점의 석판화 중 3,382점이 발표되었다. 1848년 그는 정치적인 주제에 또 다시 탐닉했고, 삽화가로서의 활동에 비해 항상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회화작업에 몰두했다. 세탁부, 삼등열차의 승객, 도제공들의 세계는 그가 즐겨 다루었던 소재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지친 일상을 거친 붓질로 대담하게 그려낸 도미에의 회화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진한 휴머니즘을 느끼게 해준다.

도미에는 1878년에야 판화와 유화, 소묘, 조각 작품들을 모아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게다가 전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시력이 거의 실명상태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빈털터리에 가까웠다. 도미에는 화가이며 친구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가 파리 외곽의 발몽두아에 마련해준 집에서 살다가 1879년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생전에 ‘캐리커처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of caricature)’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시인이자 비평가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그를 당대 최고의 소묘화가로 꼽으며 “풍자만화에서뿐만 아니라, 근대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격찬했다.

그의 대표작 <3등 열차>(1862~1864경)는 금욕적인 늙은 노파의 모습을 통해서, 근대인의 삶의 고독을 신랄하게 표현해냈다. 도미에는 인간의 잔인성과 어리석음을 예리하게 지적한 비평가이자 위대한 화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헌정된 그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보라, 여기 한 명의 선한 인간이자 위대한 미술가이며, 최고의 시민이었던 도미에가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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