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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에스파냐의 화가. 후기 로코코시대에는 왕조 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룬 작품이 많다. 고야의 작품은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혀있고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이며 전환 동기는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었다.


펜테토도스에서 출생하여 프랑스 보르도에서 죽었다. 1766년경 마드리드의 F.바이에우(l734∼1795) 문하에 들어갔고 1798년 궁정 수석화가가 되었다. 작풍은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즉 1771년부터 1794년까지 후기 로코코의 작풍과 그 이후의 것이다. 후기 로코코시대에는 프랑스 18세기의 ‘아연화(雅宴畵)’ 영향으로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룬 작품이 많다. 그 후 융그스와 티에폴로로부터 다채로운 색채기법을 배웠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보시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인물을 그렸는데, 초상화에서 인물화로 전환하였다. 1800년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harles Ⅳ》에서는 당시 궁정 사회의 인습과 무기력, 허명(虛名)과 퇴폐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유명한 《옷을 입은 마하 Maja vestida/The Clothed Maja》《옷을 벗은 마하 Maja desnuda/The Naked Maja》(1800∼1805)에서도 에스파냐의 전통적 여성이 잠자는 비너스라는 고전적 주제에서 벗어나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되어 있다.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등 고야의 인간관은 차차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에서 일대 전환한 동기는 청각을 잃을 정도의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었다.

 

그 결실이 후일 인상파의 마네에게 영향을 준 《1808년 5월 3일 The 3rd of May 1808: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1809)과 연작판화 《전쟁의 참화 Los desastres de la guerra》(1810∼1814)이다. 특히 후자에는 82장의 흑백 에칭에 살육 ·광기 ·허무 ·폭행이 철저히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판화 카로, 피라네지 등에도 열중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표적 연작판화인 《로스 카프리초스(변덕) Los caprichos》(1796∼1798, 80장)와 《디스파라테스(부조리)》(l8l5∼1850, 15장)를 보면 고야의 작품 특유의 암담한 느낌이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러한 니힐리즘 시각화를 시도하여 자신의 별장인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의 벽면을 수수께끼 같은 《검은 그림들 Pinturas negras》(1820~1823) 등의 작품으로 장식하였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고야 만년의 ‘검은 그림’으로 불리는 계열이다.

 

장르는 정물 ·종교 ·풍속 ·풍경 등 다양하며 환상성이 짙다. 《자화상》《십자가의 그리스도》 2개의 ‘마하’를 비롯한 고야의 대부분의 대표작(유화 114점, 데생 470점)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유해는 그가 그린 《산 안토니오 데 파투아의 기적》(l798)으로 유명한 마드리드의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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