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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 Kahlo

멕시코의 여류 화가. 멕시코 민중벽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으로 유명해졌으며, 교통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남편의 문란한 사생활로 정신적 고통을 극복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혁명(1910~1921)이 일어나기 3년 전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 정권이 반란군에 의해 무너진 것이 멕시코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국립예비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칼로는 지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녀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 시대의 멕시코 문화에서, 유럽의 문화적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칼로는 열여덟 살에 끔찍한 버스 충돌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 회복기 동안 그녀는 척추를 고정하기 위해 석고 보정기를 착용하고 있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살아 생전 칼로는 멕시코의 벽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 가장 잘 알려졌었다. 둘 다 애인을 두는 등 결혼생활은 문제가 많았다. 칼로의 정부 중에는 공산주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있었고, 리베라는 칼로의 여동생인 크리스티나를 정부로 삼았다. 그러나 독학으로 미술을 계속한 칼로는 마침내 그녀 자신의 힘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이교(異敎)적인 주제의 그림들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호평을 받았다.


150여 점에 약간 못 미치는 칼로의 전작(全作)은 개인과 정치의 투쟁의 연속으로서, 그녀의 인생관을 보여준다. 대중적인 멕시코의 전통 회화 양식으로 그린 칼로의 그림 레퍼토리들은 유럽의 고전 회화와 아방가르드 미술부터 대중적이고 민속적인 멕시코 미술까지, 또 로마 가톨릭, 아스텍 문명, 유럽의 철학, 칼로와 리베라가 지지했던 공산주의를 모두 아우르는 여러 믿음 체계까지, 그 기원이 다양하다. 


1926년에서 1954년 사이에 칼로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포함한 자신의 개인사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많은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했고, 국가적 자존심의 시각적 선언으로서 정물화들을 그렸다. 그러나 칼로는 죽기 일 년 전이 되어서야 자신의 나라에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그녀의 미술을 통한 투철한 자아탐구의 열정은 마돈나, 트레이시 에민, 신디 셔먼 같은 창의력이 뛰어난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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